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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은산- 밥그릇 찬가모셔온 글 2020. 10. 22. 12:49
총각 시절에 나는,
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럭저럭
먹고 살 만한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
그렇게 내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
잔잔한 수면이 넘치지도 않고
말라 없어지지도 않게
꼭 끌어안고 있었는데
결혼을 하니
이런 젠장 이게 뭔가
누가 내 밥그릇에 돌을 던지네
잔잔하게 나를 비추던 맑은 거울이 깨어지고
일렁이는 물결은 이제 네 놈의 밥그릇이
너 자신만을 비출 수는 없다고 말해주었네
어쩌겠는가 잘 살아봐야 하겠지
물과 기름이 섞일 수는 없지만
함께 할 수는 있잖는가
냉면 위 육수에 참기름을 올리면
더 맛있기도 하니까 말이야
그래 그렇게 살다가
첫째놈이 생기다 만 얼굴로 튀어나왔는데
아 이 놈이 내 밥그릇을 냅다 발로 차버리네
작고 가벼운 내 깡통같은 밥그릇이 땡강 소리를 내며
처박혔고 굶어 죽겠다 싶어 급히 주워다 보니
바닥에 금이 가서 물이 줄줄 새고 있네
그래도 예쁜 내 자식이라
좋은 집 살게 해주고 싶고
좋은 옷 입히고 싶고
맛있는 음식 먹이고 싶어
밑빠진 밥그릇에 물 붓느라
야근에 휴일근무에 쌔가 빠지는데
아뿔싸 지나친 사랑을 하였는가!
둘째가 나왔다네!
이 놈이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
팔 다리를 아동바동거리며 분유통을 빨다가
이제 지 아부지 등골 한 번 빨아보자고
속싸개 겉싸개에 돌돌 말려 집에 왔는데
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
이제 내 밥그릇이 찢어질 일만 남았네
휴가의 마지막 날,
홀로 남겨져 고즈넉한 나의 밤이
이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
마누라처럼 달콤쌉싸름하고
아들놈처럼 골 때리고
딸자식처럼 순한
이 한 병의 소주가 있기 때문이겠지
여보 걸레가 되어 찢어진 밥그릇은 걱정마시오
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간수하겠소 대신,
이 작은 소주잔만은 당신이 지켜주시오
그래 마지막 잔은
나를 위해 들어야겠다
브라보!
아버지를 위하여!
브라보!
남편을 위하여!
브라보!
밥그릇을 위하여!
[출처] 밥그릇 찬가|작성자 goodmountain7
2020091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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